소논문

요한복음 1:1절의 ‘태초’와 ‘말씀’에 관한 고찰

권순만 2009. 3. 5. 23:26

요한복음 1:1절의 태초말씀에 관한 고찰

 

서론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1:1절에 나타난 말씀, 로고스에 관한 것처럼 많은 사고와 논쟁을 가져온 말이 없다.  초기 기독론은 이 로고스 논쟁으로 점철되었다. 그런데 과연 이토록 로고스가 끊임없는 논쟁을 일으킬만한 소지가 있는 중요한 말이였는지, 오늘날도 계속적으로 심도있게 고찰되어져야 할 말인지 의문을 제기하며 본 소논문을 통해 미약하나마 사고해 보고저 한다. 아울러 태초에 관한 시간적 문제를 로고스 문제와 어떤 연관성을 제시해 보고저 한다.

 

 1. 요한복음 1:1절의 태초의 때에 관한 소고 

 요한복음 1:1절의 태초와 창세기 1:1절의 태초는 같은 단어, 같은 의미로 쓰여졌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헬라어로 쓰여졌고 창세기는 히브어로 쓰여짐으로 그 단어는 모양을 달리한다. 창세기의 태초는 히브리어로 베르쉬트이며 이는 처음 기원 출발이란 의미를 갖는다. 반면 요한복음의 태초는 헬라어로 아르케영원전 시간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창세기의 태초를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심으로 시작된 시간의 출발점의 의미로 보아도 무방하며 요한복음의 태초는 만물의 시초 이전에 존재한 시간과 차원을 초월한 영원성(시간이란 개념이 없는)으로 볼 수 있다. , 창세기의 태초는 창조전 시간을 언급하는 시간성에 중심이 있으며(시간의 시작), 요한복음의 태초는 시간 개념을 초월, 근본 존재성에 중심을 둔다. 태초 모두가 영원전 존재한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영원성으로 보아야 하지만 이런 의미를 놓고 생각 할 때 차이 구별은 가능하다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을 구별하는 유익은  로고스 논쟁의 문제를 다루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 로고스의 창조물 혹은 피조물 개념에 있어 피조물이라면 반드시 창조라는 과정이 필요하다. 요한복음의 태초는 창조전 영원한 존재성으로 로고스의 선재성을 정확히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되며 피조물 개념의 이단성을 반박할 근거가 된다.

 

2.요한복음 1:1절의 로고스

로고스 말처럼 쉬우면서 어려운 말이 없고, 무시할 수 있으면서도 결코 무시되지 못하는 말이 없는 것 같다. 초기 기독론의 대부분이 이 로고스에 관한 논쟁으로 점철 되었으며 이로 분열되고 이단이 발생 되었다.

 로고스는 헬라어로 말씀이란 뜻이다. 이는 원래 stoic (스토아) 철학자들이 우주 만물을 이루는 이성적인 원리 의미로 사용된 말이다. 이 말을 유대인들에게 신적 의미로 보급 시킨 자는 1세기 유대인 철학자 필로(Philo Judeus) 였다. 필로는 로고스를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하며 사람들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존재로 이해했다. 그의 활약과 당시 철학 사조의 영향으로 1세기 후반 로고스란 말이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무론하고 익숙한 용어가 되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사도 요한에게 이 로고스는 이처럼 그리스도의 신성, 창조사역, 중보사역을 나타내기에 적합한 용어였다. 이처럼 요한에게 있어 로고스개념은 부차적이고 종속적이고 해석적이며 특별한 독자 즉 헬라인을 위한 사용 용어였다. 그러나 실은 인간 예수를 설명하기 위해 로고스보다는 하나님의 아들 개념이 더 근본적이었다. 그런데 나중 변증가들에 의해 변경되어 로고스 자체로서 의미를 부여 받았다.

현대인의 성경(생명의 말씀사)을 보며 요한복음 1:1절이 이렇게 표현된다. 우주가 존재하기 전에 말씀 되시는 그리스도가 계셨다. 그 분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바로 그분이 하나님이셨다.

현재 성경 말씀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를 문장적으로 볼 때 주체가 전도된 느낌이다. 이를 제대로 위치에 놓고 표현한다면 이렇게 될 수 있다. 태초에 하나님이 계시니라 이 하나님과 말씀이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그리스도시니라.

우리는 요한이 말씀되신 그리스도를 강조하고자 하였음을 다분히 이해할 수 있고 또한 그리스도를 당시 헬라 철학에 익숙한 자들에게 설명하고자 로고스 자체로 표현 한것도 어느정도 수용될 수 있다. 그러나 이로 많은 사고의 혼란과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됨을 부인할 수도 없다.

 

요한의 프롤로그 혹은 Logos- hymn  희랍 영지주의의 구세주 신화와 형식과 내용에 있어 아주 비슷하다고 하여 Bultumann은 일찍이 1923년에, 요한복음의 Logos Hymn이 본래는 세례요한의 종파에서 나온 영지주의적 작품이었는데 요한복음 저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그리스도를 찬양하기 위한 찬양시로 이용했다고 주장하였다. , 영지주의의 구세주 신화의 기독교적 형태란 말이다.

최근에 와서는 이 찬양시가 신학적 배경은 헬라적 유대교의 지혜전승이란 생각이 지배적이다. 요한복음의 프롤로그에서 지혜 대신에  로고스가 나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라 한다. 왜냐면 이미 필로에게서도 로고스와 지혜를 나란히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R.H.Fuller도 그의 책 신약 성서 기독교 토대에서 지혜 사상이 팔레스틴 유대교에서가 아니라 헬라적 유대교 토양에서 기독교적 용어를 위해 맨 처음 이용되기 시작 했다고 말한다. 욥기 28:23-28에서도 지혜는 사람의 손에 미치지 않는 실체로 나타나 있어 사람이 찾는다고 해서 찾아질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찾아 세상을 창조에 이용하셨다. 잠언서에서도(8:22-31) 지혜가 윤리적 단계를 넘어 종교적 개념으로 발전돼 있으며 신학적 사변을 위해 발전되어,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진리와 지식을 찾기위해 추구해야할 어떤 것이며 계시의 매체로 되어있다. 지혜는 하나님의 피조물이지만 모든 피조물 이전에 존재했으며,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 할 수 있는 요인을 몇가지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요한이 쓴 말씀, 로고스는 명사로서 창세기에서 신이 말했다(동사)의 의미가 여기선 직접 신의 말로 명사로 언급됨을 알 수 있다. 이는 태초에 시작을 물,,공기,흙으로 보았던 그리스 철학 용어와 비슷한 유형을 주며 하나님이란 생명적이고 역동적인 것 보다 지혜같은 단순 명사로 쓰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요한일서 1:1절을 보면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생명의 말씀이란 말이 나오는데 요한복음 1:1절에서도 헬라어의 생명(테스도에스)을 첨부하는 것이 훨씬 사고를 명백히 한다. , 태초에 생명의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그리스도 예수니라.라고 표현 할 수 있다.

물론 성경을 가감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명백히 말씀하셨지만 이는 성경을 가감하는 차원이 아니라 새롭게 이해하고 인식하는 차원이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 알아야할 것은 요한은 요한복음 전체에서 말씀 , 로고스란 단어를 단 일회만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주요한 요소적 말이라면 당연 의도적으로도 여러번 사용되어짐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요한이 단 한번밖에 사용하지 않은 로고스란 단어가 왜 이토록 많은 파장을 이르키고 끊임없는 논쟁의 요소가 되는 것인가? 과연 이 로고스에 관한 끊임없는 사고와 논쟁이 바람직한 것인가? 문제는 로고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내용 보다는 논쟁하기 좋은 요소를 가지고 사고하기 좋아하는 우리 인간에게 있는 것이다.

요한의 의도는 단연 말씀이 그리스도요, 그의 선재성을 헬라인들에게 설명하기위해 로고스를 도입시킨다. 그는 분명 로고스 자체에 의미를 부여시키지 않는다.

요한일서 4:8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이 말에서 사랑은 분명 하나님의 속성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간혹 이 이해 차원을 넘어 사랑 자체가 너무 강조되다 하나님대신 되는 경우가 있다.

이탈리아 아씨시에 가면 성프란체스코의 손에 예수상이 있는 조각물을 많이 보게 된다. 본인은 이를 볼 때마다 성 프란체스코가 슬퍼하리란 생각을 한다. 예수님의 손에 있기에도 하잘 것 없는 프란체스코 자신이 이제 자신을 높이고 숭배하는 자들에 의해 예수님을 자신의 손에 놓아둔 것이다. 어떻든 이는 성인 프란체스코를 너무 강조하다 생긴 인간의 오류임에 틀림 없다. 마찬가지는 성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품안에 안고 있는 모습도 이와 같은 오류로 볼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볼 때 그리스도를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명사가 그리스도를 능가해 하나의 신으로 부상시킴에는 신학자들의 책임이 크다 하겠다.

 

오늘날 여호와 증인들은 예수님을 등급이 낮은 저급한 신으로 여긴다. 여호와 증인들은(정확히 파헤쳐 연구한 내용은 아니지만) 예수님을 아들격으로 볼 뿐 아니라 하나의 피조물로 본다. 피조물중 가장 으뜸이라 한다. 이 피조물 개념으로 그들은 요한복음 1:1절의 말씀 로고스를 지목한다.

 

종합해 볼 때 로고스에 대해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제기 할 수 있다.

1.로고스개념을 통한 그리스도의 존재에 대한 설명은 성서적인것보다 철학적이 될 수 있다.

2.철학적 해석으로 로고스가 태초의 불,,공기,흙으로 태치될 요소를 갖고 있으며 피조물로서 이해 될 위험성이 있다.

3.주요 관심사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보다 로고스에 집중된다. 그리스도를 설명하기 위해 부각시킨 로고스에 의해 그리스도는 사라지고 로고스가 주체가 된 격이다. 이로 변증가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로고스를 사용했다. 이때 구원론보다 우주론적 설명의 도구로 인용되었다.

4. 삼위일체 설명에 커다란 장애를 준다.

5. 이단의 발생 근원지가 된다.

 

결론:

1. 요한복음 1:1절의 로고스에 너무 의미를 강조하지 말아야 한다. 다분히 축소 해석해야 한다. 한번 나오고 마는 엑스트라에 너무 주연격으로 부각시킴으로 나무보다 가지에만 매달리는 누를 범했다. 로고스 개념은 신약 전체에서 요한복음 프롤로그에 단한번 밖에 나오지 않는다.요한복음의 저자 자신도 이 로고스 개념을 헬라인들게 쉽게 설명하기 위한 용어를 도입했을 뿐 로고스 자체에 의미를 두진 않았다.초기 변증가들의 논쟁속에 부각되고 위치가 상승되었을 뿐이다. 

 

2.요한복음 1:1절을 다음과 같은 의미로 해석되어져야 한다.

천지가 창조되기전 생명의 말씀이 계셨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하셨으니 이 말씀은 곧 그리스도시니라.

 

3.태초의 시간 개념을 시간 개념을 초월한(시간이란 개념이 없는) 창조전 영원성에 둠으로 말씀이 피조물 개념에서 벗어나야한다. 피조물의 이단성을 단호히 배격해야한다. (확고한 배격을 위해선 천사 창조론의 시기 문제가 별도로 연구, 설명을 요구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