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데이비드 스트라우스
스트라우스는 그의 저서 "예수전"에서 복음서의 이야기들에 대해 철저한 역사 비평적 연구를 시도했다. 그가 역사적 비평의 과제를 삼았던 것은 두가지였다. 첫째, 복음서 이야기에서 역사적이라기 보다는 신화적이라고 판단할 수 밖에 없는 요소들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둘째 , 이 신화적인 이야기들이 어떻게 성립되어 예수와 결부되었는지를 제시하는 것이다.
스트라우스가 이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 신화적인 해석 방법이었다.이것은 종래적 초자연적인 방법과 합리작인 방법을 비판적으로 종합한 것이었다. 초자연적인 방법은 복음서의 초자연적인 요소들은 본문에 기록된 그대로 역사적인 사실로 설명했다. 반면 합리적인 방법은 역사적으로 또는 합리적으로 설명 가능한 내용만을 진실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 해석이다. 스트라우스는 이 두가지 방법의 난점과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제3의 방법으로 신화적 해석을 도입했다. 그는 복음서의 초자연적인 요소를 단순한 역사적 사실로 간주하거나 여분의 장식물로 이해하지도 않았다. 그것들을 복음서 저자들이나 초대 교회가 예수의 중요성에 대한 그들 자신의 의식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들로 해석했다.
신화는 전설의 무의식적인 창조력에 의해 형성되고 하나의 역사적인 인물속에서 구체화된 종교적인 개념들을 역사적인 이야기 형태로 표현한 것을 의미한다. "복음적 신화는 예수에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관련된 이야기를로서 사실의 표현이 아니라 그의 최초의 추종자들의 관념의 산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다.
스트라우스는 역사적인 인물 예수와 기독교인들이 믿는 신앙의 그리스도를 철저히 구분했다. 그에 따르면 나사렛 예수는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가 죽은 후 추종자들은 그에게 무의식중에 전설적이고 신화적인 속성을 부여했으며 메시아에 관한 구약 성서의 구절들에 근거하여
스트라우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역사적 회의주의에 빠져 복음서의 역사성을 지나치케 과소 평가하고 '예수전'을 부정적으로 연구 했다는 것이다. 그는 예수의 탄생,수난,부활,승천,이적과 같은 복음서의 거든 모든 초자연적인 이야기들을 신화로 취급했다. 그의 역사 비평적 연구는 전통적인 기독론에 큰 손상을 주었으며 기독교를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3. 죄렌 키에르케고르
키에르케고르는 추상적인 개념만을 중시하고 실재와 사실을 무시하는 헤겔에 대항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이 실존이다. 헤겔은 존재라는 말을 사상가의 사유와 같이 관념적이고 보편적으로 이해했던 반면 키에르케고르는 존재를 이 세계의 실제로 생존하고 있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존재로 이해했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의 존재 양식을 실존으로 보았다. 실존은 개인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취하는 태도이다. 따라서 실존 개념은 인간이란 무엇인가하는 물음을 키에르케고르가 변형시킨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진실한 인간 존재, 곧 실존은 하나님 앞에서 홀로서는 단독자였다. 단독자는 그의 사상의 중심 개념이었으며 사람들에게 단독자가 되도록 일깨우는 것이 저술 활동의 목적이었다. 그는 단독자가 되는 길을 세가지로 생각했다.
실존의 첫 단계는 미적 실존이다. 이것은 감각적인 집접성의 영역이다. 이 단계에서의 삶의 목적은 향락이다. 이 미적 단계의 생활은 절망,권태,불안에 대한 승산 없는 싸움이다.
두번째 단계는 윤리적 실존이다. 미적 실존과 윤리적 실존의 경계선에 아이러니(irony)가 있다. 이를 통과해야 미적 단계에서 윤리적 단계로 이동할 수 있다. 아이러니는 가장,변장 또는 가면을 쓰는 것을 의미한다. 윤리적 단계의 특징은 의무와 의무에 대한 복종이다. 그러나 윤리적 실존은 같은 것이 반복되는 삶이다. 결국 인간은 이런 반복에 대한 권태로 절망하게 이르게 된다.
세번째 단계는 종교적 실존이다. 종교적 실존의 촛점은 고난이다. 윤리적 실존과 종교적 실존의 경계선은 유머(humor)이다. 유머는 바울의 표현대로 "원하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적 단계를 이르기 위해 거쳐야 하는 것은 절망이란 것이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면서 또한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다. 죽음에 이르기 때문에 신앙이 일어날 수 있다. 따라서 절망은 신앙의 길을 열어주는 가능성이다. 여기서 키에르케고르는 역설(paradox)의 개념을 도입했다. 다른 인간의 실존은 인간 스스로 도달할 수 있으나 종교적 실존은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인간과 영원한 질적인 차이를 가지신 하나님만이 이 절망을 해결할 수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기독교를 역설의 종교로 간주했다. 그것은 이중의 역설에 기초하고 있다.
첫째,영원한 하나님은 그 본성과는 정반대의 존재, 즉 시간적인 존재로서 나타나셨다. 하나님은 인간의 형태로 존재하셨다. 둘째 시간적인 인간은 첫번째 역설에 대한 신앙으로 말미암아 그 본성과는 정반대의 존재 즉 영원한 존재가 될 수 있다.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간과 영원의 교차, 즉 신-인의 오심을 인식하는 데 있다. 이것은 우리의 이해와 설명 능력을 초월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비로서 파악된다. 따라서 시간과 영원의 교차는 헤겔식의 정반합의 운동이 아니라 절대적인 역설이다. 참 하나님과 참 인간이 한 인격 안에 동시에 존재하는 신이란는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절대적인 역설인 것이다.
4. 알브레히트 리츨
19세기 후반기의 프로테스탄트 신학 사상에 접근하려면 첫번째로 이해해야할 사상가가 리츨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신학은 신정통주의의 영향 때문에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신정통주의 신학의 대표자들인 바르트와 부룬너는 리츨이 고전적 기독교를 완전히 이탈했다고 비판했다.
리츨은 당시 기독교가 성서적이며 종교 개혁적인 모습을 상실하고 다른 형태로 변형되었음을 지적하고 칸트와 슐라이에르마허의 사상 체계에 근거하여 종교 개혁적인 기독교를 회복하려고 하였다.
그의 신학의 특징은 윤리적인 면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는 계몽주의 철학자 칸트에게로 뒤돌아갔다. 칸트는 "순수 이성 비판"에서 순수 이성으로 하나님의 존재,영,혼,불멸,자유와 같은 현상의 세계를 초월한 문제, 즉 대상 자체를 인식할 수 있다고 본 종래의 형이상학을 거부했다. 그는 단지 시간과 공간을 통해 경험되어지는 현상의 세계만을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간의 지식의 범위를 현상의 세계에 국한시켰다. 따라서 그에게 하나님에 대한 형이상학적이며 철학적 인식은 불가능했다. 리츨은 이런 칸트 철학에 근거하여 형이상학이나 이론적 사변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원천이 된다는 것을 거부하고 신에 대한 불가지론적 입장을 취했다.
한편 칸트에게 또 다른 인식의 영역이 있었는데 그것은 도덕적 의식의 영역, 실천 이성의 영역이다. 인간은 누구나 도덕적 의무를 인식하고 있다. 칸트에게 있어 종교는 도덕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을뿐 아니라 종교는 곧 윤리의 문제였다.
리츨은 기독교를 하나님 나라를 창건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위에 세워진 영적 윤리적 종교로 정의 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의식의 발전 단계에 따라 종교들을 분류했다. 우상 숭배나 물신 숭배는 가장 낮은 단계인 동물적 의식에 속하고, 다신교는 그 다음 단계인 감각적 의식에 속하고 유일신 종교만에 최고 단계인 종교적 의식에 속한다. 리츨은 기독교의 독특한 성격을 유일론적 신앙으로 확인하려한 슐라이에르마허의 노력을 높이 평가했으며 그의 활동을 완성하는 것을 자신의 신학적 과제로 삼았다. 이외에도 리츨은 인간적 측면으로부터 하나님에게 접근하려는 슐라이에르마허의 방법론을 계승했다. 하나님은 단지 세계내에서의 활동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사물 자체를 지각할 수 있다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의 인식론을 거부하고 우리는 사물의 실체를 그 활동에서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리츨은 기독교인의 경험 또는 의식에 기초해 종교를 감정이나 직접적인 자기 의식 표현으로 이해 기독교 교리들을 기독교인의 감정들에 대한 기술로 정의한 슐라이에르마허의 신학을 심미적 해석으로 기독교의 도덕적인 면을 축소하며 자비와 용서의 진정한 평가를 배제한다고 비판했다. 그러므로 리츨은 경험에 대한 심미적 해석보다 윤리적인 해석을 시도하고 종교적 신비적 성격보다 윤리적 성격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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