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예언(prophecy)과 가르침(teaching)
예언은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안위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덕을 세우고 권면하며 안위하는 말씀, 즉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것이다. 이를 볼 때 예언은 하나님의 메시지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가르침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가르침을 우리는 훌륭한 설교로 이해할 수 있다. 오늘날 대부분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를 혼용해서 이해하고 있다. 즉 예언을 단순한 미래적 일을 제시하는 의미의 이해를 떠나 현재에 대한 의미도 내포한다는 것으로 이해되어질 때 예언은 하나님의 메시지로 이해되어 질 수 있고 설교를 이와 동일한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가르치는 은사는 로마서 12장, 고린도전서12장, 에베소서4장에 모두 언급되어 있다. 가르치는 은사의 대표자는 사도 바울 자신으로 가르침에 있어 듣는이로 잘 알아듣기 쉽게 또는 설득력 있게 가르치는 은사이다. 이는 반드시 학문적인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물론 지성인들에겐 학문적 논리성이 설득력을 주는데 필수 이지만 어린아이들에겐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대학 교수라고 어린아이들을 잘 가르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예언은 말이라는 수단을 수반하여 덕을 세우고,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으로 가르침이란 방법을 사용할 수 밖에 없고 이렇게 생각할 때 예언은 자연스럽게 가르침을 동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작용에 있어선 예언은 덕을 세우고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 되나 가르침은 반드시 이를 목적으로 하지는 않는다.
2.요한은 "보혜사 구절"이라고 불리우는 구절들(요14:16-17,26;
요한은
요한은
진리의 영이란 절대 불변의 영이며 이는 예언의 은사에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다
예언의 은사는 알지 못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는 영이다. 무엇보다 장래일을 알려주는 영이다.
이상에서 볼 때 의심과 논란의 여지 없이 요한은 성령의 역할을 예언의 은사를 주시는 분으로 말하고 있다.
3.모든 기독교인들이 전도의 은사를 갖고 있는가?
딤후
또한 마28:19-20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이를 볼 때 전도는 또한 그리스도의 명령이다.
종합해 볼 때 전도의 은사는 따로 없으면 전도는 은사라기 보다 신자의 의무이며 순종해야할 명령이다. 그러나 각사람에 따라 전하는 것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어떤이는 진정 기쁨이 차고 넘쳐 벅찬 감격으로 전도할 수 도 있고, 어떤이는 남을 잘 설득하는 가르치는 은사로, 어떤이는 남과 친구가 되기 쉬운 섬김의 은사등으로 남보다 많은 전도의 성과를 보일 수 있는데 이를 달리 표현하면 전도의 은사라 볼 수 도 있겠다. 비록 성경엔 전도의 은사란 것은 없지만 오늘날 성경에 없는 은사들을 내용에 따라 은사들을 많이 열거하고 있다.
2.성령의 은사는 교회가 본연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신자 개인에게 각각 다른 모양으로 주어진다.(고전12:7-11)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은사를 교회를 위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한다. 결코 자신을 과시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되며 많은 은사의 소유자에게는 더 큰 희생과 봉사가 요구됨을 알아야 한다.
3.은사의 다양성과 더불어 바울이 강조하는 바는 은사의 통일성이다. 은사가 비록 개별적으로 주어졌다 해도 그것은 결코 개인의 교만이나 방편이 되어서는 안되며 오히려 교회 공동체 유익을 위하여 각각 맏은 바 기능을 충실히 유지해야 한다.(롬12장).
4.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구하라.(엡3:20)
5. 사랑을 따라 구하고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고전14:1)
모든 신자들이 꼭 필요한 경우에는 어느때든지 모든 은사를 각각 사용할 수 있다고 하는 학설이 있는데 이들은 은사들은 일시적인 소유에 불과한 것으로 주님께서 얼마동안 주셨다가 다시 거두어 가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은사가 일시적으로 나카나는 것은 얼마든지 인정할 수 있으며 이 은사는 영구성을 갖지 않는다 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같이 경우에 따라 행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성령의 은사와 혼동해서는 안된다.어떤 사람이 한번 온전한 성령의 은사를 받으면 그 은사는 일생 지속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은사를 육체의 몸으로 비유했는데 육체의 많은 지체가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에도 많은 성령의 은사들이 있을 것이고 육체의 몸과 같이 지속성을 유지할 것이다.
특별한 상황에서는 은사가 임시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은사는 대부분 일시적으로 영구성은 유지하지 못한다. 그러나 타고나는 재주처럼 주어지는 은사는 영구적이라 할 것이다. 타고나는 유전적 재능이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와 수시로 바뀌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종합적으로 은사는 임시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영구적으로 주어지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6.성령세례가 수여되는 근본적인 목적.
웨슬리적 성결운동에 영향을 입은 초창기 오순절주의자들은 중생과 더불어 성결을 성령세례의 선행조건으로 간주했으나 케직의 영향을 받은 후기 능력주의적 오순절주의자들은 성결을 성령세례의 선행조건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이들은 성령세례의 주요 목적은 복음전파와 봉사를 위한 능력 부여임을 천명한다. 성령세례가 성결보다는 능력이라는 것은 누가복음의 능력 성령세례론에 근거한다.
Lesslie Newbigin은 오순절운동을 카톨릭과 개신교 운동 다음에 일어난 제3의 물결로 간주하면서 기회는 주어진 말씀과 제도에 설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과 함께 임하는 것에 있어야 함을 권고한다. 오순절주의자들은 성령세례의 경험을 기독교 삶과 영성에 새로운 차원의 시작으로 본다. 성령세례를 받기 전보다 후에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더 많은 성력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다고 믿는다. 오순절날 성령 강림은 성령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의 기원이다. 왜냐하면 믿는 자로 하여금 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차원의 영적 체험과 능력과 영성을 가지게 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기존교회들은 예수의 신적 불변성에 입각하여 성령세례의 현세적 기능성과 연속성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순절주의자들은 오늘날 성령세례를 통하여 오순절날 성령강림의 본질이 그대로 재현 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 근거는 히브리서
성령세례의 궁극적 목적은 복음전파와 봉사를 위한 능력부여이다. 성령세례는 회심과 구원보다 능력과 직접 연관되어 있다. 능력을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뜻과 목적에 더 관심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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